혁명 전후의 러시아 영화와 러시아의 대표적인 영화감독인 에이젠슈테인 및 그가 정립한 몽타주이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영화 <전함 포텐킨>의 오데사 계단
1. 혁명 전후의 러시아 영화
세계 최초의 영화는 1895년 12월 28일 오후 9시에 상영되었습니다. <라 시오타 역으로 들어오는 기차>라는 영화였는데, 그 영화를 만든 이는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였다.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하고 수개월이 지나지 않아 그들은 1896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찍기 위해 러시아로 왔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연극 막간에 소개된 영화가 러시아 최초로 상영된 영화였습니다. 영화는 발명과 동시에 러시아에 수입되었으므로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서구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영화 분야에서는 러시아가 세계에서 선두적인 지위를 차지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1907-1017년 사이 러시아에서는 1,7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그중 남아있는 것은 300여 편입니다. 1908년 제작된 <스텐카 라진>이 러시아 최초의 영화였습니다. 당시에는 오락과 도피를 원하는 대중의 기호에 맞춘 상업 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러시아 혁명은 영화의 발전에 더없이 좋은 환경으로 작용했습니다. 혁명 사상을 전파하는 데 있어 영화만큼 좋은 매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레닌은 영화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해 혁명의 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는 역할을 영화에 주문했습니다. 1920년대 러시아 영화는 민중에게 혁명의 정당성을 어필함과 동시에 다양한 실험을 모색했습니다. 이 시기 러시아 영화는 개인보다는 집단을 중시했고, 혁명 정신을 민중이 쉽게 수용할 수 있도록 다큐멘터리 기법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1918년 정부는 모스크바에 국립영화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에는 영화제작 및 배금을 국유화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당의 통제는 소비에트 영화사 전체의 특징이 됩니다. 모스크바는 영화제작에서 제1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레닌그라드로 개명된 페테르부르크는 제2의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1914년에 설립된 렌필름과 1924년에 설립된 모스필름은 지금까지도 러시아 최대의 국영영화사입니다.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1920년대 러시아 무성영화는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많은 분야의 예술가들이 다른 출구들이 막히자 영화계로 전향해 활동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방가르드 연극에서 출발하여 영화로 옮겨간 에이젠슈테인 감독이었습니다. 소비에트 영화는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출현으로 일약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2. 에이젠슈테인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1898-1948)은 소련이 배출한 세계 영화사적 의의를 갖는 감독입니다. 그는 라트비아 리가 출신이었으며 초기에는 모스크바의 아방가르드 연극 집단에서 다양한 형식의 연극을 실험했습니다. 혁명을 지지했던 그는 새로운 혁명적 미학을 만들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1924년 연극에서 영화로 나아갈 것을 결심했습니다. 영화는 더 큰 융통성과 관객들에게 작용하는 더 많은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그해에 첫 영화 <파업>을, 그리고 다음 해에 대표작 <전함 포템킨>을 제작했습니다. 단 일곱 편으로 비교적 소수의 영화를 만든 그는 몽타주 이론을 정립하여 세계 영화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혁명과 소비에트 사회 건설을 다룬 <파업>(1924), <전함 포템킨>(1925), <10월>(1927), <전선>(1929)과 이색적인 소재를 실험한 <멕시코 만세>(1931), 그리고 19세기 역사 오페라의 영화적 변형이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 넵스키>(1938)와 <이반 뇌제>(1944-1946)가 있습니다.
3. 몽타주
에이젠슈테인 감독과 몽타주 이론은 늘 쌍둥이처럼 따라다닙니다.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 이론을 처음 개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영화제작에서 몽타주란 편집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미국에서는 신속한 컷 편집이라는 의미로 몽타주를 사용했는데, 소비에트에서는 최초로 레프 쿨레쇼프 감독이 필름 한 조각에 무엇이 선행하거나 뒤따라오느냐에 따라 의미적 변화가 일어나는 방식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워크숍에서 그의 몽타주 기법 원리에 따라 영화 연기 원리들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쿨레쇼프 효과’로 잘 알려진 이론에서 그는 몽타주를 통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의미 효과를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당대 유명 배우인 이반 모주힌을 통해 실험을 했는데, 무표정한 모주힌의 얼굴을 찍은 쇼트에 스프 접시, 죽은 아이, 아름다운 여인의 쇼트를 결합했을 때 관객들이 각각 배고픔, 슬픔, 욕망을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에이젠슈테인은 쿨레쇼프처럼 자신의 필름들을 직접 편집했습니다. 그는 편집한 필름들을 폭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포들에 비유하면서, 쿨레쇼프가 필름 조각들을 연속적으로 연결해야 하는 벽돌처럼 취급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포 간의 갈등, 즉 숏들 내의 갈등이었습니다. 그에게 몽타주는 영화 구성의 내적 원리였습니다. 서로 갈등 관계에 있는 세포(숏)들이 충돌할 때 새로운 의미가 생성된다는 것입니다.
4. 영화 <전함 포템킨>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중에서 <전함 포템킨>은 세계 영화사에서 빠짐없이 거론되는 중요한 영화입니다. 1905년에 일어난 혁명 20주년을 기념하여 만든 영화로 오데사에서 일어난 러시아 수병들의 반란을 소재로 만들어졌습니다. 무성 영화이면서 간간이 인물들의 말이 하나의 쇼트에서 글로 제시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사람들과 구더기’, ‘갑판 위에서의 드라마’, ‘죽은 자는 호소한다’, ‘오데사 계단’, ‘함대와의 만남’이라는 제목을 단 다섯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문적인 배우들이 아닌 일반인들이 집합적인 주인공을 연기한 군중 장면이 매우 자주 등장합니다.
수병들의 반란은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 한 조각 때문에 시작됩니다. 수병들이 함장에게 불만을 토로하자 함장은 수병들의 대표인 바쿨렌추크를 사살하도록 명령합니다. 수병들은 반란을 일으켜 일곱 명의 장교들을 사살하고 전함 위에 붉은 깃발을 게양합니다. 수병들은 이미 두 주 동안 파업 노동자들과 시 정부가 사실상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오데사로 포템킨 호를 몰고 갑니다. 바쿨렌추크의 시신은 항구에서 도시로 이루는 대리석 계단의 발치 아래 놓입니다. 항구의 진입로에 거대한 인파가 모여 그의 시신 주위에 화환을 놓고 추모합니다. 수병들을 환영하기 위해 계단에 모인 오데사 시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된 군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향해 발포합니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오데사 계단의 긴 시퀀스는 몽타주 기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대표적인 장면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아있습니다. 또한 발포 소리를 듣고 깨어나는 사자 석상의 연속된 세 개의 숏은 차르 체제의 억압에 항거하여 일어서는 러시아 민중의 봉기를 위한 메타포로 해석됩니다.
이 영화를 처음 상영할 때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날 밤이 될 때까지 아직 필름의 편집이 다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겨우 마지막 편집이 끝났을 때 영화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에이젠슈테인은 필름을 넣은 상자를 품에 안고 오토바이 뒤에 탔는데 오토바이가 붉은 광장에서 고장이 나고 만 것입니다. 그는 오토바이를 내버려 두고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볼쇼이 극장까지 오백 미터 가량을 뛰어갔습니다. 그때는 필름을 갈아 끼우는 사이에 불을 켜는 휴식 시간이 있었는데, 필름이 도착할 때까지 휴식 시간은 20분이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국가의 탄생>, <시민 케인>과 더불어 초기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념비적 작품으로 남아있습니다.
소비에트 초기 영화감독으로는 프세블로드 푸도프킨, 알렉산드르 도브첸코, 레오니드 트라우베르크, 지가 베르토프, 야코프 프로타자로프, 보리스 바르네트 등이 있습니다. 니콜라이 에크 감독의 <인생안내>(1931)는 최초의 소비에트 유성영화로 간주됩니다.